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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 무역역사와 대량생산까지 참혹한 희생들

틱톡2 2016. 9. 23. 16:47

설탕 무역역사와 대량생산까지 참혹한 희생들


설탕의 원료 사탕수수나 사탕무가 재배된 시기는 기원전부터 재배되었지만 결정화되기 시작한것은

4세기 인도 굽타왕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결정화된 설탕은 인도, 아랍상인들의 중요한 상품이 되었죠.

물론 당시 설탕은 지금처럼 가루형태가 아니라 단단하게 굳힌 덩어리형태로 필요한 양만큼 잘라서 사용하였으며

이전에는 시럽형태로 설탕을 활용했죠.





설탕을 재료자체를 전량수입해야 하고 가공하는 부분도 돈이 많이 들어가는 상품이기 때문에

귀한상품으로 취급받았으니 음식에 마구 사용하기에는 부담이 있었죠

그래서 주로 음식보존용이나 약에넣어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설탕이 유럽에 전파된 시기는 11세기 십자군원정을 통해 전파되었습니다.

당시 사탕수수는 유럽 지중해 일부지역에서만 재배가능할 정도였으며 사탕수수 재배를 위해서는

많은 노동력과 물이 필요하기 때문에 비싼 작물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컬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면서 대항해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그러자 설탕은 주요 교역품으로 취급되었고 항해술이 발전하면서 멀리까지 식민지건설이 가능해지면서

식민지기후에서 견딜수 있는 원주민이나 이주노동자의 노동력을 활용한 플랜테이션 농업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해지면서 돈좀있는 왕족과 귀족들을 통해 소비량이 늘어나게 되었죠


일단 설탕 자체가 비싼 상품이니 돈있는 사람만 소비할수 있었고 자신의 부를 자랑하는 수단으로

설탕만 이요한 설탕 공예음식등이 나오기도 하였습니다. 그렇다보니 설탕공예가 발전했지만

영국여왕 옐리자베스 1세 치아는 썩어서 모두 시커멓게 변했다고 하는군요

그래도 항상 공급이 달렸을 정도로 인기상품이었죠

그리고 18세기 지중해 원산지인 설탕무에서 설탕추출에 성공하면서 유럽은 설탕을 대량으로 생산할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설탕을 더욱 쉽게 구할수 있게 되었고 설탕은 음식을 더 맛있게 해주는 효과가 있어

더욱 설탕소비가 늘어나게 되었죠





산업혁명이 가속화되면서 식민지도 점차적으로 늘어나게되자 카리브해 근처섬들에 플랜테이션 농장을

만들어 대량생산이 이뤄지면서 설탕가격이 낮아지면서 이제는 하층민도 고가의 기호품이었던 설탕을

즐길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시아쪽으로 살펴보면 17세기 기마 웨카타 신죠라는 사람이 설탕제조법을 류큐로 드여오면서

오키나와의 류큐왕국에서 사탕수수 농사가 시작되었으며 일본에서도 에도시대 큐슈남부 사쓰마국을

지배하던 아마미군도로 전해지면서 일본전역에 흑설탕이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의 화과자가 그렇게 단 이유가 요때 들여온 흑설탕을 사용하면서 부터죠.

그리고 류큐왕국은 흑설탕수출이 주요 산업이었고 사츠마의 자금줄이 되면서 메이지유신을 달성할수 있었습니다.





설탕의 주요원료인 사탕수수농사는 노동력이 많이 필요하며 설탕을 사탕수수에서 추출하기 위해서도 노동력이

많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보다 싼값에 설탕을 얻기위해 제국시대 서인도제도의 노예를 통한 플랜테이션 농장을 통해 설탕을 생산하면서

설탕이 대중화된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값싼노예를 아프리카에서 배에실어 데리고 올때 비인간성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는데

이러한 사실이 유럽에 알려졌을때 설탕불매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죠

아무튼 지금도 열악한 저임금과 환경속에서 사탕수수재배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결론을 내리자면 설탕이라는 상품을 대량생산해서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유럽의 각국은 식민지를 건설해

비인간성으로 노예를 다루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죠

오키나와도 마찬가지로 설탕을 얻기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해 나간 역사를 본다면

인간은 참 잔인하구나 라는 생각을 문득 하게 됩니다.

물론 그로인해 과학적, 경제적, 사회적 발전이라는 측면도 있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