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신대기근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경신대기근은 현종재위기간 1670년~1671년 경술년과 신해년에 걸친 2년간의 대기근으로
임진왜란이 더 나을 정도의 극악의 대기근으로 조선판 흑사병이라고 할정도로 당시 조선인구의 10%에
해당되는 200만명이 사망한 대기근이죠
경신대기근이 일어난 원인은 당시 지구의 기온이 1도정도 떨어지는 소빙하기 기후로 당시 중국은 소빙항기로 인해
감귤농장이 전멸했으며 유럽의 포도수확이 늦어질 정도였고 당시 우박, 벼락, 가뭄, 눈, 태풍, 지진등의
자연재해가 가장 심하게 나탔죠
1670년 경술년 대형유성이 관측되었고 각지역에서 지진등의 자연재해가 발생했으며 전염병 해충까지 겹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전염병이 돌면서 사망자가 속출했고 가뭄까지 들었으며 비가 오지 않아 새작물을 파종할 계획을 접어야 할정도로
우물과 냇가가 말라가는 동시에 서리로 인해 냉해피해까지 발생했죠
여기에 우박까지 쏟아지면서 농산물에 대한 피해가 커지게 되었고 우박으로 인해 사람과 동물이 맞아죽는
사건까지 일어났습니다
여기에 이미 가물어 제대로 곡식이 자라지 못해 농사를 망친 상태에서 큰비까지 내려 더 큰피해를 입게 되었죠
또한 메뚜기떼가 쓸고 가면서 그나마 남아있던 곡식까지 피해를 입는등의 최악의 재난이 발생하게 되었죠
1670년 6월로 접어들면서도 우박이 계속되었고 7월부터는 폭우로 물난리가 났으며 특히 지역적으로
나타나는 자연재해가 아닌 전국적으로 나타난 자연재해였으며
7월인데도 불구하고 눈과 서리로 인해 추수를 앞둔 작물에 대한 피해가 컸습니다.
여기에 초대형 태풍이 제주도와 경상도를 휩쓸면서 제주도에 해일로 인해 바닷물이 산과 들로
밀려와 작물들이 소금물에 의해 말라 죽으면서 제주도민 대부분이 굶었을 정도입니다
더불어 구제역까지 창궐하면서 엄청난 양의 소가 폐사하였고 냉우까지 더해지면서 물에 빠져죽거나
우박에 맞아죽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냉우로 인해 눈과 밭이 잠기면서 사람들은 먹고살기 위해
청나라 국경까지 넘게되자 외교문제로 커지게 되었죠
그리고 8월부터 10월까지 물난리로 인해 수확해야할 농산물 대부분의 씨가 말라버리는 동시에
11월 바로 전염병으로 더욱 커지는 상황에 소빙하기로 인해 유독 추운 겨울을 보내야 하는 상황에
얼어죽는 사람들이 빈번했죠
이렇게 1670년 경술년 각종 자연재해 및 전염병으로 인해 전국적으로 대흉작이 일어났는데
이렇게 전국 모든 지역이 모두 흉작을 기록한것은 경술년 이때가 처음이라고 하며
대흉작으로 인해 먹을게 없다보니 굶는 사람들이 속출하면서 아사자가 급증하기 시작하고
먹을게 없다보니 기존에 법으로 금지했던 도축금지령을 폐지하고 소를 도축하는 일이 잦아졌으며
구제역으로 인해 죽어서 묻은 소를 다시 파내서 먹다 전염병으로 걸려 사망한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고 합니다.
1671년 신해년으로 넘어오면서 더욱 상황은 악화되었고 이때 공식적으로 집계된 전국 아사자가 만명이 넘는 수준이었으며
먹지를 못하니 면역력이 떨어지면서 더욱 질병에 대한 저항력이 떨어져 질병으로 인한 사망자도 늘어났으며
당시 이를 타계하기 위해 개소한 진휼소에 전국에서 서울로 몰려들면서 전염병이 더욱 빠르게 전파되었습니다.
그렇다보니 궁궐의 궁녀까지 감염되어 현종의 다섯째누이 숙경공주는 마마병으로 사망하기도 하였죠.
따라서 이렇게 서울에 퍼진 전염병을 피하기 위해 서울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로인해 행정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없어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가지 못했으며 서울을 탈출하려는 관리들은 이것저것 핑계를 대서 사직서를
제출하면서 더욱 행정공백이 가중되었죠
그리고 일가족 대부분이 죽거나 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으며 행정인력이 부족해 제대로 시신처리가 이뤄지지않아
시신수습을 위해 수천구를 서울밖에 합장매장하는일이 수차례 일어나 전염병에 의해 사망한 사람은 약
5만명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런 대기근으로 인해 부모들이 아이를 도랑이나 강물로 버리는 사건이 일어났으며
남편이 옆에서 쓰러저 죽었는데 아내는 옆에서 죽을 모조리 먹은후 곡을 했다고 하며
아들이 어머니를 버리는 사건등이 일어나기도 했죠
거기다 어머니가 어린 자식들을 죽여 인육을 먹었다는 일까지 발생할 정도로 헬조선 상태였죠
경신대기근 당시 재상급 인사들도 10여명씩 죽어나가는등 지배층도 기근으로 죽어나갔지만
그래도 나름 성리학적 근검정신으로 나름 잘 극복했다고 볼수 있습니다.
2년간의 경신대기근 이후 조선내부의 불만세력이 많이 생기면서
장길산이 활동했을뿐 아니라 미륵신앙도 흥성했고
보다 유민을 통제하기 위해 오가작통제를 본격적으로 활용하게 되었죠
그리고 대기근 이후 대동법으로 부터 부담을 완화시켜주면서 대동법에 대한 지지여론이 높아지기도 했고
양반계층의 경제력이 약화되면서 농장을 해체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그로인해 노비제도를 해체하는
분위기가 되었죠
더불어 당시 소빙하기로 유독 추운 겨울날씨로 인해 추위를 견디기 위한 온돌이 전국적으로 보급되면서
나무땔감수요가 늘어나면서 산림자원이 급속도로 고갈되면서 농업생산성이 저하되는 문제가 발생하면서
18세기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산림소유권을 주장하는 산송이 증가하게 되는 동시에
산림보호를 위한 금산규제와 대규모 식목이 시행되었지만 늘어난 수요를 공급이 따라가지 못했죠
사실 경신대기근으로 인해 조선은 나름 합리적으로 구휼책을 시행했지만 비축된 재정이 적어
구휼에 사용할 재정이 금방 소비되어 버린 문제가 있지만 그래도 다른 나라의 대기근때 대처한것과
비교한다면 나름 대처를 잘했다는 평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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